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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상식

파스카 성삼일 성목요일 성금요일 파스카성야 부활시기

by 현명한도미니카 202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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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성삼일

 '파스카 성삼일은 한 해의 전례주년에서 가장 거룩하고

뜻깊은 기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3일 동안을 말한다.

 

곧 "주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은

주님 만찬 저녁 미사부터 시작하여 파스카 성야에

절정을 이루며 부활 주일의 저녁 기도로 끝난다."

(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19항)

 

 '파스카는 본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이스라엘 빅성은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내려진

주님의 명령에 따라,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 밤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뒤 허리에 띠를 두르고 

쓴나물과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이집트를 떠날 채비를 했다.

 

 그날 밤 짐승의 피가 묻어 있는 집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맏아들이 모두 죽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에 놀란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었다.(탈출 12.1-42)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인도로 이루어진 이 사건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건너감'을 뜻하는 낱말인 파스카를 

축제 이름으로 삼았다. 그 뒤 파스카 축제는 민족의 잔치로

자리 잡았다.

 

 구약의 파스카는 신약의 파스카인 부활을 미리 보여 준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당신의 파스카 신비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하느님을 완전하게 현양하는 업적을 이루셨다.

곧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우리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

(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18항)

 

오늘의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기에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 주님 만찬 성목요일

 

 교회는 주님 만찬 저넉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다.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이 만찬을

미사로 재현한다.

 

오늘의 묵상

구원역사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파스카 성삼일이

주님 만찬 저녁 미사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만찬'장면을

소개합니다.

제1독서는 구약의 파스카 만찬을, 제2독서는 초대 교회의

만찬을, 복음은 예수님의 파스카 만찬을 소개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권고한 만찬을 기점으로 '구약의

파스카'가 시작되었듯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기점으로

'신약의 파스카'가 시작된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서가 전하는 만찬 이야기는 '사랑'과 

'섬김'이라는 주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이 가까워짐을 감지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드러내어 표현하십니다.

사랑은 감출 수 없는 것이기에 언제나 구체적 행위를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 씻김'이라는 상징적 행위로 '사랑은 섬김'

으로 드러나야 함을 알려 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손님을 초대하면, 덥고 건조한 흙길을 오래

걸어야 하였을 손님을 배려하여 먼저 발을 씻게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집안의 종이 하던 일을 당신께서

손수하시며 사랑은 섬김으로 표현되어야 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라고 물어보시는데

그리스 말 성경 본문에는"깨닫겠느냐?"라는 동사가 먼저

나옵니다. 

 

'알겠니?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의 의미가 강조되어 있고,

그 답은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로 제시됩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한 것처럼 섬김으로 실천되는 사랑이

우리가 하여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기득권자들의 불의한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을 배신한 

인간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랑은 이제 성삼일 내내 장엄히

기억되고 기념될 것입니다.

 

2. 성체 조배

주님 만찬 저녁미사 영성체 후 기도를 바치고 나서,

성당의 다른 곳이나 경당에 알맞게 장식하여 특별히 마련한

성체 보관 장소(수난 감실)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모셔 가는 행렬을 시작한다.

그동안 찬미가 "입을 열어 찬양하세"(마지막 두 절을 남겨 두고)

나 다른 성체 노래를 부른다.

 

행렬이 성체 보관 장소에 이르러 사제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께 분향할 때 "입을 열어 찬양하세"의 마지막 두 절

"지존하신 성체 앞에"나 다른 성체 노래를 부른다.

(주님 만찬 저녁 미사에 참여한 이들은 저녁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

 

성체 조배는 주님 수난 예식 전까지 계속한다.

성체를 모셔 두는 장소는 기도와 묵상의 분위기가 이루어지도록

마련하되,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은 하지 않는다.

성체는 감실이나 성합에 모시고 문을 잠가야 하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성광에 모시어 내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후에 숨을 거두셨기 때문에

이 감실은 '무덤'이 될 수 없으므로 '무덤'이라는 표현도

해서는 안된다.

성체 보관 장소(수난 감실)는 '주님의 묻히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금요일의 성체 분배와 병자들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 두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26.40)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머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자들은 주님 만찬 저녁 미사 다음, 밤 시간 동안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앞에서 조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자정이 지나면 소박핱 분위기에서 조배를 한다.

주님 수난의 날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3. 주님 수난 성금요일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성찬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본디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들어와

오늘날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금육과 함께 파스카 단식을 한다.

 

오늘의 묵상 

인간은 좋은 가르침이나 교육만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혹독하게 주입된 정보나 지식이 우리를 결코 참다운

인간으로 변모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불행하게도

고학력 사회인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쉽게 확인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의 정직한 희생과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성숙과 성장은 '주입'이 아닌 '발견'

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신

이유는, 죽음까지 넘어서는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제자들을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그분의 가장 가까이에서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면서도 변하지 않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온전한

사랑과 희생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그의 흉한 몰골에 많은 이가 질겁하고,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의 처참함을 받아들이는 사랑, 우리의 병고와

고통을 짊어지는 사랑,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얺는 사랑,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라고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만날 때 비로소 인간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불행해하지 않게 됩니다.

'완전한 사랑'으로 충만하여지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다 이루어졌다."라는 구절이 라틴 말로 '다 소모되었다.

완전히 소진되었다.'인 것을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소모적인 신비입니다.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조차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다 써 버린 사건을 기념하는 성금요일, 이날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완성과 승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부활 시기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주님 부활 대축일은 가장

장엄하고 중요한 축일이며, 또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3세기 초까지 교회는 이 부활 축일만을 기념하였다.

 

 부활시기는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50일 동안 이어진다.

교회는 '파스카 시기' 라고도 하는 이 부활시기를 마치 '하루의

축일' 또는 하나의 '큰 주일'처럼 지내며, 옛부터 은총의 열매를

가장 많이 얻는 시기로 받아들여 왔다.

 

 초기 교회에서는 부활 축제를 파스카 성야에서 시작하여

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 지내다가, 부활의 기쁨을 더

누리고자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또다시 부활을 기념하는 6주간의 전례가 더해져

오늘의 부활 시기가 완성되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날짜는 해마다 달라지는데, 교회는 춘분

다음에 오는 보름날(음력15일) 뒤의 첫 주일로 정하였다.

 

 부활 시기에는 사순 시기 동안 금지하였던 '알렐루야'와 '대영광송'

을 다시 노래하며, 전례적으로 감사와 기쁨을 드러낸다.

그리고 부활시기에는 평일에도 전례를 거행할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파스카 초를 제대 옆 또는 독서대 옆에 켜 놓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전례 개혁 이후로는 부활

시기가 끝난 다음에도 세례 때나 장례 미사 때에 파스카 초를

밝히도록 하였다.

부활 시기에 사제가 입는 제의의 색깔은 기쁨과 새로 태어남을 

나타내는 흰색이다.

 

4.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파스카 성야의 모든 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념하여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을 기념한다.

따라서 교회는 장엄한 전례로, 죽음을 이기시고 참된 승리와

해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한다.

 

오늘의 묵상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킨 여자들은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무덤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안식일이

지나자 ,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등), 부활이

실제 사건임을 강조하는 기능을 합니다.

 

곧 '부활'은 구체적 시공간에서 발생한 현실의 사건이고, 시간

부사구들을 통하여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간 첫날'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주님의 날'(주일)입니다. 구약 시대 창조가 이루어진 

첫째 날 "빛이 생겨라" 하신 말씀으로 빛이 생겼듯이 (창세1.3)

이제 새로운 창조의 첫째 날 '그리스도의 빛'은 어둠을 이기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합니다.

 

 한편 무덤 입구에 도착한 여자들은 돌이 굴려져 있음을 보고

당황하는데, 이때 사용된 그리스 말 동사의 형태는 수동형으로

이 일이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임을 명시합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몸소 주도하신 사건임을 분명히 선언한 

것 입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그들은 흰옷을 입은 젊은이를 만나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셨으니 더 이상  무덤에는 계시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건너감'(파스카)의 역사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종살이에서 자유인으로

건너감이며, 이는 어떤 변화에 대한 '관념'이나 '추상적 암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사실' 이며

'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실제적 변화와 구원의 현실을 "용약하여라!"

라는 노래로 축하하고 기념합니다.

 

그 건너감이 나의 현실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믿고 '두려워 하지

말고' 갈릴래아로 가는 것, 이제 부활의 빛으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입니다.

 

-매일미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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